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카무라 사건 (문단 편집) === 나카무라 대위의 행로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Shintaro_Nakamura.jpg|width=280]] || || 사건의 발단이 된 나카무라 신타로 대위 || 나카무라는 1931년 5월 10일 도쿄를 출발하여 뤼순의 관동군 사령부에 들러 봉천에서 받은 여권 외에 하얼빈에서 받은 여명학회 간사, 농학사라는 가짜 신분증 등을 지참했고 관동군 참모부 조사반의 주선으로 북상, 흥안령 일대의 조사에 착수했다. 나카무라는 이스기 엔타로(井杉延太郎) 예비역 기병 상사, 백계 러시아인 시로카프, 안내인인 몽골인 등 다른 일행 총 3명과 동행하여 6월 6일 치치하얼을 출발, 흥안령을 남하하여 제심하 상류를 거쳐 색륜을 지나 7월 3일에 조남에 도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당연하지만 이러한 군사정찰 행위는 법률 위반이었다. [[장쉐량]]은 일본의 만몽분리정책에 자극받아 흥안령 일대 일본인 출입을 금지한 바가 있었으나 이러한 불법행위를 일본 외무성의 현지 주재기관인 재만몽영사관이 조사의 편의를 위해 여권 2개 등을 제공하며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나카무라 대위의 요청에 따라 봉천 총영사가 5월 5일 여권을 발급해주었고 같은 달 14일 하얼빈 총영사도 별도로 여권을 주었다. 봉천 여권으로는 조남 지역을 여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제한이 없는 하얼빈 여권을 별도로 받은 것이었다.][* 봉천의 하야시 총영사는 여권 수속 와중에 나카무라 대위의 신분을 교원으로 세탁해주었으며 하얼빈 총영사도 중국 측에 보낸 공문과 허가증에 나카무라의 직업을 생략하고 이름만 기재하였다.] 이러한 은폐 공작에도 이미 중화민국 관헌은 그들의 행동을 눈치채고 감시하였고 일본 측도 이 사실을 알아차려 5월 31일 주만주 영사 대리가 외무성에 지질학 연구를 명분으로 파견됐음에도 중국과 몽골 관헌이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보고를 올렸다. 나카무라는 6월 9일 이렬극특 역에서 말 3마리를 얻어 조남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소악공부 부근에서 이들의 소식이 끊어졌고 예정일이 되어도 조남에 나타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